Michel Platini
장군으로 불리던 프랑스의 대스타 미셸 플라티니, 현재 UEFA회장이기도 한 그의 이야기 입니다. 오늘부터는 조금 분위기를 바꿔서 이야기를 전개해 볼까 합니다. 좀 더 편안한 분위기로 말입니다. 하하. 플라티니의 이야기는 분명 길어질 듯 하니, 여유를 가지고 편안하게 봐주시길 바랍니다.
프로필
이름 : Michel François Platini
생년월일 : 1955년 6월 21일
신장/체중 : 178cm / 74kg
포지션 : MF
국적 : 프랑스
국가대표 : 72시합 41득점
수상 : 1983~1985년 3년 연속으로 발롱도르 수상 (유럽최우수선수상)
장군 플라티니의 이야기
우선 선수시절의 이야기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왜 그의 별명이 장군이었을까요? 일단 플라티니는 플레이메이커 였습니다. 팀의 핵심이었지요. 넓은 시야와 우아한 테크닉을 갖추고 있었으며, 훌륭한 득점 감각에 예술적인 프리킥 실력까지 겸비하던 선수였습니다. 선수 시절에 큰 상을 내리 3번이나 휩쓰는 등 훌륭한 기록도 많이 가지고 있지만, 한편으로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플레이를 펼치며 지금도 많은 이들이 기억하고 있는 선수가 바로 플라티니 입니다.
플라티니는 중원에서 패스로 지휘하는 고전적인 플레이메이커 스타일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패스도 잘했지만, 사이드로도 치고 들어갔으며, 과감하게 중앙을 뚫고 페널티에리어 안까지 파고들어서 득점을 만들어 내기도 했습니다. 현재로 친다면 섀도우 스트라이커가 가질 수 있는 재능(위치선정,골결정력등)을 놀랄만큼 잘 가지고 있는 무서운 미드필더 였습니다. 아예 경기를 만들어 내는 선수였지요.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프리킥을 대단히 잘 찼는데, 중요한 대회 때 마다 천금같은 프리킥 골을 넣어서 80년대 당시만 해도 프리킥 하면 플라티니를 빼놓을 수 없을 정도로 모두에게 인정받던 프리키커 였습니다.
워낙 카리스마와 영향력이 대단했던 선수가 바로 플라티니였습니다. 괜히 장군이겠어요? 1976년 국가대표 데뷔이후에 프랑스 국가대표팀은 플라티니를 중심으로 굴러갔습니다. 그 정도로 영향력이 뛰어났던 선수였기에, 오히려 그가 은퇴 하고 나서 한동안 프랑스 대표팀에 걸출한 선수가 등장하지 못하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자 그럼 본격적으로 플라티니의 이야기로 가봅시다.
1972년 AS낭시에서 17살의 나이로 선수생활을 시작합니다. AS낭시, 현재는 프랑스 1부리그인 리그 앙에 속해있는 팀입니다만, 그 당시에는 1부리그와 2부리그를 왔다 갔다 할 정도의 약소 클럽이었습니다. 하지만 플라티니가 본격적으로 주전으로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낭시팀은 눈에 띄게 좋아졌고, 75-76시즌에는 이 젊은 장군이 20골이나 넣으며 1부리그 7위까지 팀을 이끄는 등 무서운 활약을 펼칩니다. 이 때부터 프랑스 대표에도 선출되면서 더욱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합니다.
1981년, 20대 중반이 되었고 이제 프랑스 축구계에서는 유명한 플라티니는 리그 우승 9회에 빛나는 명문 AS생테티엔으로 이적하게 됩니다. 이적하자마자 플라티니는 좋은 활약을 펼치며 80-81시즌에서 생테티엔은 10번째 리그우승을 차지하게 됩니다. (생테티엔, 이후에는 주춤하더니 지금까지 우승이 없었습니다. 작년에는 11위했더군요.) 그리고 이 맘 때 중요한 것이 하나 더 있으니, 바로 플라티니가 이제 프랑스 국가대표팀의 주장을 맡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1981년 스페인월드컵 예선이 되었습니다. 요한 니스켄스 등이 남아서 활약하고 있던 강호 네덜란드 (74,78년 월드컵 연속으로 준우승이었습니다) 와 플라티니 장군님의 프랑스는 같은 조에 편성되었습니다. 예선부터 박터지게 생겼지요. 끝까지 본선진출팀을 알 수 없었고, 결국 막판에 네덜란드 VS 프랑스의 당대 빅매치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플라티니 장군님 프리킥 골을 작렬시키면서 2-0 으로 네덜란드를 제압. 결국 강호 네덜란드는 본선진출에 실패하고 맙니다. 프랑스는 환호했지요.
이윽코 1982년 월드컵 본선무대, 플라티니를 중심으로 테크니션들이 많았던 프랑스 축구는 속도보다는 정확성과 깔끔함을 무기로 승승장구 합니다. 물론 첫 경기부터 잉글랜드에게 3골을 허용하는 등 조별리그에서는 고전했습니다만, 결국 준결승전까지 진출했습니다. 서독과의 경기. 3-3 까지 가는 격렬한 사투 끝에, 승부차기에서 패하면서 아쉽게 프랑스는 4강 진출에 만족해야만 했습니다. 파올로 로시라는 스타가 등장한 이탈리아가 우승을 차지했지만, 프랑스의 주장인 장군 플라티니의 포스도 굉장했습니다. 명문팀들이 이제 그에게 눈을 돌리기 시작합니다.
1982년, 미셸 플라티니는 세리에A 로 무대를 옮기게 됩니다. 바로 명문 유벤투스로의 이적입니다. 당시 유벤투스는 월드컵 우승멤버들을 대거 보유하고 있었으며 뛰어난 선수가 많았던 강팀이었고 호화군단이었습니다. 이러한 실력 있는 쟁쟁한 멤버들 가운데서도 플라티니는 전혀 기죽지 않고, 오히려 팀의 중심선수로 우뚝 서게 됩니다. 1983-84시즌, 1985-86시즌 유벤투스의 세리에 A 리그우승을 이끄는 인물이 바로 플라티니 였습니다. 이 때의 활약은 눈부신데 이제까지 플라티니는 프리킥을 잘 차는 테크니션이자 공격적 미드필더 였다면, 이 맘때 부터는 골을 넣는 감각까지도 월등히 좋아져서 공격수 수준으로 골을 몰아넣기 시작합니다. 첫 3시즌 동안 88시합에 출장해 무려 54골이나 넣었습니다. 유벤투스에서 은퇴할때 까지 세리에 A 에서 147시합 68골을 넣었는데, 이는 단순히 수치로만 본다면 2경기마다 한 번씩은 플라티니의 골이 터졌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 때의 플라티니는 뛰어난 미드필더 이면서 무서운 공격수이기도 했습니다. 3년 연속으로 세리에 A 득점왕을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과연 장군님의 포스가 느껴지는가요?
자, 그럼 이번에는 큰 무대에서 한층 더 빛을 내었던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바로 1984년 유럽선수권 (유로84) 의 이야기입니다. 프랑스에서 개최했던 유로84는 현지에서도 대표팀에게 뜨거운 관심과 응원을 보냈습니다. 조별리그를 3연승으로 돌파하는 프랑스는 준결승전에서 포르투갈을 만납니다. 연장 대접전 끝에 플라티니의 역전 결승골로 3-2 로 통쾌한 역전승을 거두며 프랑스는 결승전까지 진출합니다. 스페인과의 결승전에서 2-0 으로 승리하는 프랑스. 유럽선수권 우승은 프랑스에게 돌아갔으며 이것은 프랑스 사상 첫 메이저 타이틀이었습니다. 플라티니는 놀랍게도 매 시합 골을 넣으며 9 골을 기록하며 득점왕에 올랐습니다. 중원을 압도하는 이 때의 프랑스 축구 스타일을 보면서 샴페인 축구 같다는 찬사도 이어졌습니다. 플라티니는 웃음을 가득 안고서 우승트로피를 들어올렸지요.
이어서 1984-85년 챔피언스리그 이야기도 해야겠습니다. 당시 잘나가던 막강 유벤투스는 결승까지 오르면서 첫 우승을 눈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결승상대는 83-84년 챔피언스리그 우승팀이기도 했던 80년대 잉글랜드의 최강자 리버풀이었습니다. 이 경기는 축구팬이라면 한 번 쯤 얼핏 들어봤을 법한, 바로 1985년 5월 벨기에 브뤼셀 헤이젤 스타디움이었습니다. 열기는 뜨거웠습니다. 그리고 서포터들끼리 대단한 패싸움이 발생하고 맙니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헤이젤참사 입니다. 39명 사망, 중경상자만 600명에 이르는 참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후 잉글랜드팀은 국제대회 5년간 출장금지(리버풀은7년)의 중징계를 받게 되었지요. (이후 맨유가 1999년에 챔피언스리그 정상에 설 때까지, 오랜기간 챔피언스리그에서 잉글랜드 팀들을 잘 볼 수 없게 되었지요.)
이야기로 돌아와서 경기는 PK 골을 넣은 유벤투스의 1-0 승리로 끝납니다. 유벤투스의 사상 첫 챔피언스리그 우승이었지요. 이 시절의 플라티니는 세계가 인정하는 명선수였으며, 유럽최우수선수상인 발롱도르도 1983,84,85년 3년 연속으로 수상하는 등 절정기를 달립니다. 하지만, 플라티니는 경기가 끝나고 이 헤이젤참사 비극의 개요를 알게 된 이후 큰 충격을 받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 1987년 4월, 30대 초반인데도 불구하고 은퇴하지요.
은퇴 후, 1989년부터 1992년까지는 프랑스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기도 했습니다. 젊은 칸토나 등을 등용하면서 유로92에서는 전승으로 예선을 돌파하는 등 강력한 우승후보로 프랑스가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본선에서 돌풍의 핵이자 우승팀이 되었던 덴마크에게 1-2 로 패하며 조별리그에서 탈락하고 맙니다. 플라티니는 미련 없이 책임을 지고 은퇴 했으며, 이후 더 이상 축구감독을 맡지 않았습니다.
세월이 많이 흘러, 1998년 프랑스월드컵 조직위원장을 맡는 등 축구계에서 일을 해오던 플라티니는 2002년에 드디어 FIFA와 UEFA의 집행위원회 위원이 됩니다. 그리고 2007년 1월, 52표 중에 과반이 넘는 27표를 획득하며 UEFA 회장에 선출됩니다. 장군님이 이제 회장님까지 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지금 어떤 일들을 추진하고 있을까요?
우선 그는 개혁안을 내놓고 있습니다. 현재의 시스템은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고 보다 더 정의로운 대안들을 내놓고 있습니다. 현재는 빅리그에서 속해 있으면 UEFA 챔피언스리그 출장권이 4장씩 분배되는 데, 이것을 3장으로 줄이고 다른 나라와 팀들에게 좀 더 기회를 주려고 하고 있습니다. 또한 빅클럽들의 비정상적인 어린 선수들을 싹쓸이 하는 것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고 나서고 있습니다. 점점 부익부 빈익빈 되어가는 현재의 상황에 브레이크를 걸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현 회장인 플라티니 장군님의 생각입니다. 많은 기대를 모으고도 있으며 한편으로는 (이미 유리한 위치를 가진) 기득권 세력들의 반발과 또한 잘 될까 라는 우려들도 한 몸에 받고 있습니다. 필자는 감히 플라티니를 지지하는 바입니다. 모두가 업그레이드 되는 길을 선택해야 축구팬들도 더 재밌는 게 아닐까 합니다. 부자 명문 구단들끼리의 챔피언스리그 나눠먹기가 계속될 수록, 또 여기에 익숙해 질수록 점점 격차는 커져가고 급기야 나중에는 "뻔하지 뭐" 라면서 흥미를 잃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원래 이변이 있어야 또한 재밌는게 축구 아니겠습니까, 대한민국이 많은 이들의 예상을 뒤엎고 당당히 4강까지 올라간 것 처럼 말이에요. 클럽간, 그리고 리그간 격차가 해소되는 방법을 고민하고 추진해 나갈 때, 플라티니의 새 시대는 더욱 좋은 평가를 받게 될지도 모릅니다. 문제는 그게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이지만요. (사람마다 이 문제에 대해서 견해가 다르리라 생각합니다, 여하튼 저는 플라티니를 지지하는 입장에서 해본 소리입니다.) 이 플라티니 회장님에 대해서는 바셋님의 글(http://blog.daum.net/puskas/7188524)도 함께 읽어보시면 아주 좋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덧붙이면서 장군님은 파스타를 좋아하신다고 합니다. 그래서 은퇴 후에는 선수 시절에 비해서 살을 좀 찌우시고 말았습니다 (웃음) 그리고 유명한 어록도 많은데, 몇 개 꼽자면,
"축구에 인종은 없다. 서투른 백인이 흑인을 차별한다."라고 발언하면서 인종차별자 들에 대해서 인간이 덜 되었다며 일격을 날려주셨습니다. 또한 축구는 실수의 스포츠라면서 실수 없이 완벽한 플레이만 있다면 스코어가 0-0 이 될 수 밖에 없다는 유명한 발언도 있습니다.
플라티니는 프랑스 축구계의 첫 메이저 타이틀을 이끈 선수이자, 지금의 프랑스 축구가 있게끔 프랑스 축구의 지위를 한층 드높인 선수이기도 합니다. 예술적인 프리킥을 날리던 그가, UEFA에서 거침없는 하이킥을 끝내 날릴 수 있을 것인지... 오늘부터 플라티니에 대해서 기억해 주시고, 플라티니의 열정에 대해서 뜨거운 관심을 보내보는 것은 어떨까요? 이것으로 긴 플라티니의 이야기를 마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